Fashion Life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진정한 크리에이터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예술가적인 마인드로 끊임없이 새로운 화두(話頭)를 던지며 국내 패션계의 미래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디자이너 이상봉. 음악 영화 오페라 그리고 연극까지… 영원한 예술의 향기가 넘쳐나는 도시, 파리를 닮은 디자이너 이상봉을 이야기한다.

Editor  임효준  

 

예술가적인 패션 디자이너

 

“ 처음부터 패션 디자이너를 꿈꿔 온 것은 아닙니다. 학창시절 글쓰기를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연극의 매력에 빠져 카다르시스를 맛보면서 자연스럽게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의 길로 오게 된 것 같아요.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저는 순간순간의 현실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잡을 수 없는 내일보다 인터뷰하는 바로 이 순간 현실에 충실하다보면 어느새 뭔가가 이루어져 있더라구요. 후후  ” 

 

글을 쓰기 위해 1954년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연극과에 입학한 그는 마음 속 내재된 번뇌 사고 감성의 에너지를 외형적으로 뿜어내는 연극에 매료된다. 이런 숨은 예술가적인 성향은 고스란히 오늘날의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을 탄생시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상봉의 패션쇼는 특별하다. 처음 한순간 열정적인 퍼포먼스로 관객들을 압도하고 음악에 맞춰 무대를 활보하는 전체 모델들은 옷과 분장으로 컨셉에 맞는 이미지를 연출해 패션 관계자와 프레스들의 감성을 사로잡는다. 강한 남성적인 선들과 자연적이면서 에스닉하고 어떤 면에서는 토템적인 그만의 강렬함은 파리에서도 새로운 호기심 불러 일으키며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성복 디자이너로 5년 동안 일하면서 하고 싶은 디자인을 마음껏 펼쳐 보이겠다며 선보인 ‘디자이너 브랜드 이상봉’ , 세컨드 브랜드 85년 ‘소호’와 95년 ‘이상봉 아트 컬렉션’.  이 모든 것 역시 힘든 창조의 고통과 함께 아픔으로 마음에 새겨진 자식과도 같은 존재로 그의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 그 자체였다.

 

“ 롯데 백화점 내에 디자이너 캐릭터로 선보인 ‘소호’는 주방용품 생활용품 가구 등을 함께 전개했죠. 아쉽지만 그 당시의 시장 현실보다 너무 앞서 결실은 보지 못했지만 지금 패션업계가 그 형식을 모델 삼아 사업을 전개하는 것을 보면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옵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와서 런칭한  ‘이상봉 아트 컬렉션’ 역시 저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상품으로 내놓았죠.  예를 들어 스포츠나 등산을 하고 바로 회사에 출근할 수 있는 그런 컨셉의 옷과 컵, 수영복들 말이죠. 또 순수하게 손만을 사용한 인간적인 작품을 상품으로 제시하기도 하고요. ”

 

진정한 자유을 꿈꾸는 자유인

 

내성적인 어린시절부터 그에게는 세상과의 대화,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했다. 지금도 글 그림 무용 오페라 퍼포먼스 등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그 어떤 작은 것에도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

 

“진정한 자유는 생각의 제한이 없는 것입니다. 무한 상상력으로 선과 악의 구분까지도 초월한 상태를 말합니다. 단지 행위로만 옳고 그름을 절제하면 됩니다. 또 감정의 충실함도 중요합니다. 웃고 싶은 때 웃고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합니다. 눕고 싶을 때도 누울 수 있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나’라는 존재의 안과 밖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것들에 열린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이 정말로 자유스러울 수가 있겠죠. 패션쇼 역시 내 자신이 원하고 즐기고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찾아주는 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또 다른 부분인 것입니다.   ”

 

그런 그에게 파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이면서 세계 패션의 중심지 입니다. 디자이너라면 파리에서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꿈꾸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나 파리에서의 성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한 계단 한 계단 도전하는 그 과정을 더 중요시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9월 초 파리 전시회와 9월 말 뉴욕 전시회를 거쳐 10월 초 다시 파리 패션쇼를 할 계획이다. 이번 패션쇼의 키포인트는 문화이다. 한국적인 문화를 서양의 복식과 접목시켜 대한민국 감성을 다양하게 표현할 예정이다.

완벽한 사람보다는 뭔가 비어 보이는 사람이 더 정이 간다는 그. 옷을 잘 입는다는 것도 자신의 성격 외모 색깔을 상황에 맞춰 잘 어울리게 표현 한 것이라며 그래도 역시 옷에 대해 관심과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이 잘 입을 것 같다며 미소 짓는다.

 

“ 한순간 모든 것을 다 틀어 버리고 종교인이 될지 마냥 여행만을 다닐지 모릅니다. ”

 

얼마 전 사무실을 이전해 아직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파리패션쇼 준비에 더욱 분주한 그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찾은 것은 그의 행보(行步)에 우리 패션계의 앞날을 조심스레 점쳐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파리를 품은 그를 언제까지나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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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준

하나의 촛불이 백 개의 촛불과 다르지 않는 이유는 “깨어있는 성숙한 시민의 눈물”이기에 그 아픔과 깊이는 똑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꽃을 피우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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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김삼숙


동양적인 자연을 모티브로 서양의 복식을 잘 조화시켜 세계 패션계에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동양의 빛깔과 문양, 그리고 정서를 디자인하는 따뜻한 여인을 소개한다.
Editor
임효준


20여 년간 패션만을 생각하며 젊음과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세계적인 일본 디자이너 고시노 히로코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선생님의 기본적인 스타일은 지키면서도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죠. 책임감과 함께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싫지 않았어요. 정말 프로라 생각하며 일했습니다.”


고집도 장점이 되는 사람

쏟아지는 비에 이제는 우울함 마저 느껴지는 서울 하늘 아래서 반갑게 손을 내밀며 맞아주는 디자이너 김삼숙을 보는 순간,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에 사로잡힌다. 한순간 우울함도 사라져 버렸다. 패션디자이너 김삼숙. 한국인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도쿄 컬렉션에서 실력과 함께 끼를 발산하며 패션계의 굵직한 이미지로 일본에서 성공적인 K-I-M 독립브랜드를 선보이면서 명성을 쌓다가 국내에 들어온 지는 3년 반밖에 되지 않았다.

“패션디자이너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 드라마틱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사고뭉치에 여우짓이 보통이 아니었데요. 한번은 어머니께서 아끼시던 한복을 인형옷으로 만들어버린 적도 있어요. 하지만 뭔가를 결정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과감한 성격은 지금의 패션디자이너로서의 모습을 갖는데 한 몫한 것 같아요.”

그가 처음 사회생활을 한 직업은 다름아닌 은행일이었다. 활동적인 그가 정적인 일을 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행동에 간간히 사고를 치던 그 숨은 끼를 어찌하랴. 한 순간 그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린 사건이 벌어진 곳은 친구의 결혼식장이었다.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패션관계자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저마다 세련된 감성과 함께 멋스러운 자태를 보이는 것에 매료되었죠. 그때 패션 디렉터 일이 참 어울리겠다는 패션디자이너의 말 한마디에 패션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그다. 그 당시 국내에는 장발단속과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다. 누구보다도 자유스러운 그에게 같은 동양이지만 이국적인 일본에서의 패션공부는 자신의 인생을 건 새롭고 즐거운 도전이었다. 그런 그의 선택은 옳았다. 졸업할 무렵에는 디자이너 공모전에서 유감없는 실력과 잠재력을 인정받으며 곧바로 세계적 디자이너 브랜드고시노 히로코사에 입사하게 된다.

“지금도 그 당시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성격 중에 장단점을 이야기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장점은 어떤 곳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이라고 이야기했죠. 고집이 좀 단점이라는 말과 함께요. 밤새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자신감 넘쳤던 모습이었습니다.”

고집까지도 믿음직스러운 그를 회사는 바로 OK한다. 그리고 곧바로 찾아온 행운. 2 6개월만에 수석디자이너가 된 것이었다. 그의 열정 못지 않게 인간적인 따스함은 힘든 일본생활에서도 회사 직원들과의 두터운 우정을 쌓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정감 넘치는 그는 아름답다

일본 패션계에서 그녀의 성공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결혼도 잊어버리고 프로다운 근성으로 일에 모든 것을 던졌다. 그런 그가 고국,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잦은 해외 출장과 일본에서의 생활로 가족들을 자주 찾아보지 못했어요. 99년 영국 출장에서도 짧은 어머니와의 통화가 마지막이 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너무나 슬퍼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후회없는 삶이었지만 이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집도 언니집 근처에 자리잡은 것이다. 3층짜리 주택으로 1층은 전통적인 앤티크 가구들이 있는 오리엔탈 분위기의 티룸으로, 찾아온 손님과 함께 차를 곁들인 담소를 즐기는 공간이다. 2층은 작업실로 3층은 갤러리로 넓은 정원과 함께 텃밭도 보이는 것이 솔직 담백한 그와 잘 어울린다.

“국내에 들어와서 하루종일 인사동 거리를 돌아 다녔어요. 충분히 쉬면서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에 다시한번 놀라게 되었죠.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 패션쇼도 경복궁을 배경으로 전통 민화.동양 자수.전통 가구문양 등을 모티브로 하면서 병풍을 만들 때 사용하는 수로 옷을 디자인했었죠.”

인터뷰하는 동안 그녀 주변에는 실크와 쇼콜라라는 강아지들이 갖은 애교를 떨었고 고양이 참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벽면 한켠에는 하회탈과 한국전통 공예품과 전통 고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옷만으로도 누구의 디자인 작품 인지를 알 수 있게끔 자신의 옷스타일을 충분히 살려나가야 할 것 같아요. 배우는 학생들과 관심있는 소비자들의 눈도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이예요. 소박하면서 부드럽고 인간적인 감성으로 사람과 꽃.나무..바다 등 자연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디자이너 김삼숙은 너무나 편안하다. 자신이 먼저 편하게 행동하면서 상대방까지도 편안하게 행동하게 만든다. 따뜻한 배웅까지 손수해 주는 그. 하나의 옷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도 이렇게 따뜻하지 않을까. 그리움이 깊어가는 가을, 참 좋은 사람을 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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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준

하나의 촛불이 백 개의 촛불과 다르지 않는 이유는 “깨어있는 성숙한 시민의 눈물”이기에 그 아픔과 깊이는 똑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꽃을 피우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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